오케스트라에서 음악감독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똑같은 단원들로 똑같은 레퍼토리를 연주해도 누가 음악감독을 맡느냐에 따라 소리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작년 9월 미국 정상급 오케스트라인 뉴욕 필하모닉의 현 음악감독 얍 판 츠베덴이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선임됐다는 소식에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이 한껏 들떴던 이유다.
지난 20일과 2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츠베덴의 서울시향 공식 데뷔 무대는 그 기대를 충족하고도 남았다. 츠베덴이 선보인 작품은 베토벤 교향곡 7번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협연 없이 오로지 지휘자와 악단 간 호흡에 집중할 수 있는 교향곡 레퍼토리로 정면승부를 본 그는 역시 ‘오케스트라 트레이너’란 별명이 꼭 맞는 명장임을 증명했다. 서울시향에 정명훈 음악감독 시절 이후 ‘제2의 전성기’가 올 것이란 기대와 관심이 쏟아지는 이유다.
현악의 포근한 음색과 선명하게 뻗어나가는 목관의 선율, 금관의 깊은 울림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베토벤 특유의 밝고 웅장한 에너지를 발산했다. 장송곡을 떠올리게 하는 2악장에선 츠베덴의 정교한 지휘가 돋보였다. 선율에 새로운 성부가 더해지는 순간마다 아주 얇은 종이를 쌓아 올리듯 색채의 깊이를 더하면서 베토벤의 심오한 서정을 펼쳐냈다. 마지막 악장에서 츠베덴은 마치 악단의 능력치를 시험해보겠다는 듯 극한의 속도로 연주를 몰아쳤다. 악상의 순간을 온전히 느끼기엔 다소 급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으나, 작품 특유의 격렬함을 극대화했다는 점에선 긍정적이었다.
마치 작은 눈덩이를 굴리며 서서히 몸집을 키우듯 섬세하게 진행되는 셈여림 변화와 소리의 길이까지 꿰맞춘 듯 하나로 통일된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게 연주하는 기법)에서 악단이 츠베덴의 지휘와 해석에 온전히 몰입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느린 2악장에선 관악과 현악으로 이뤄지는 두 개의 선율이 정교하게 맞물렸다.
마지막 악장은 1부와 마찬가지로 통상 연주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진행됐다. 현악의 단단한 음향과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금관의 울림, 목관의 맑은 색채가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밀도 높은 연주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의 긴장감을 선사했다.
뒤로 갈수록 급해지는 템포에 일부 구간에서 소리가 어긋난 점은 아쉬웠으나, 전체 악기군이 통일성을 잃지 않고 본연의 색채와 리듬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상쇄할 만했다.
분명한 결과를 보장하는 만큼 츠베덴은 평소 단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지휘자로 유명하다. 기본적으로 많은 연습량을 요구할 뿐 아니라, 실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1 대 1로 연주력을 점검하는 고강도 훈련도 마다하지 않는다.
강한 카리스마의 배경에 음악에 대한 그의 철학이 있다. 츠베덴은 평소 “무대 위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수”라고 말한다. 지난 1월 열린 기자간담회에선 “무대에서 90%의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110%를 준비해야 한다. 음악감독의 임무는 단원 모두 더 나은 연주자가 되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내년 1월부터 정식 임기가 시작되는데도 불구하고 음악계에서는 그의 존재감이 이미 서울시향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음악계 관계자는 “정명훈 음악감독 시절 이후 서울시향 연주에 관객이 이토록 뜨겁게 환호한 무대는 없었다. 첨예하게 호흡을 맞춰 가야겠지만 단원들의 높은 집중도, 지휘에 대한 신뢰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무대였다”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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